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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system (Feenberg, 2017)

번역노트

by actant 2022. 3. 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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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부분 발췌 번역)

 

어떤 기술도 섬이 아니다. 모든 기술은 시장과 정부에 의해 매개된다. 더욱이, 경제적, 행정적 활동은 그 자체로 회계, 경영, 광고와 같은 다양한 '과학들'인 기술학분야에 의해 구조화된다. 이는 푸코가 정신의학과 범죄학의 정치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의미하게 탐구한 문제이다. 기술학분야에 대한 시스템의 의존성과 상호 중재는 현대 사회의 필수적인 특징이다. 이 모든 시스템의 구체적인 합리성은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경제적이든 행정적이든 기술적이든 그것은 본질적으로사회기술적(sociotechnical)이다. 이것이 바로 루카치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물화된합리성이다.

 

존재론적인 유한성(한계성)은 기술의 본성과 인간존재로서의 우리 본성을 다룬다. 인식론적인 유한성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은 기술의 민주적 윤리와 본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함의한다.

 

인간은 오로지 우리 스스로가 속하고 있는 시스템 상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 그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 어떤 변화도 우리에게 역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우리의 육체적, 사회적 존재의 실질적(practical) 의의이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인과적 힘과 의미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우리의 몸은 자연법칙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문화적 세계에서태어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다. 우리의 유한성은 행동(작용)과반응(반작용)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기술적 행동은 비뉴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어떤 물체에 대해 기술적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피드백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데, 분명히 우리의 영향력에 비례하지 않는다. 이것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환상을 낳는다. 주체는 연결성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행동하는 세계로부터 스스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 환상은 전통 사회에서 덜 만연하다. 공예 지식과 일상적 경험이지속적인 의사소통 안에 있는 곳에서는 기술장치의 사용으로부터 배운 교훈이 전통에 흡수되고 기술 활동을 몇 가지 관습적 유형들로 제한한다. 근대적 관점에서이는 개발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핵에너지와 독성화학물질과 같은 기술에대한 최근의 경험은 규제의 지혜를 나타낸다.

 

대부분의 근대 테크놀로지는 공예와는 상이한 체계 하에서 발전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통제는 장인에게서 기업 소유주와 그들의 대리인에게로 넘어갔다. 자본주의 기업은 사회기관들 가운데서도 매우 좁은 목표를 갖고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 목표를 추구할 자유는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환경에대한 관심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경험의 교훈은 무시된다. 산업화 과정 내내 노동자와 그 부작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침묵한다. 기술발전은 방해받지 않은, 추상화된 기술학분야에 의해 유도되어 진행된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환상은 자본주의의 좁은 초점을 보완하며, 더불어 우리가 우리자신을 위한 결과가 없이도 세상에 작용(행동)할 수 있음을 보장한다. 오직 신만이 그가 작용하는 체계 바깥에서, 세계의 바깥으로부터 대상에 작용할 수 있다. 기술작용을 포함해 모든 인간 행위는 행위자를 인과적 피드백과 의미의 효과에 노출시킨다. 예컨대 인과적 피드백을 소멸시키거나 지연시키는, 기술작용의 힘에서 발생한 부작용에 대한 무관심을 생각해 보라. 테크놀로지의 핵심은 행위자 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총이 토끼는 죽이지만 사냥꾼은 죽이지 않는 것, 망치가 나무를 변형시키지만 목수는 아닌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구는 뉴턴의 등가 및 반작용 원리으로부터 도구 사용자를 보호하면서외부 세계에 힘을 집중시키도록 설계되었다. 

 

자연의 의미조차도 기술적 변혁의 대상이 된다. 임신 초기에 태아의 성별을 식별하는 초음파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서는 성별 때문에 태아를 낙태하는 부모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의 행위를. 인간의 선택으로 만든다. 이전에는 운명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는 계획될 수 있다. 심지어 정보를 찾거나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조차 "자연"에 유리한 선택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번식을 기술화했고, 따라서 생식 기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의미를 변화시켰다.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부여하는 철학적 견해를 가류주의(fallibilism)라고 부른다. 가류주의는 모든 다른 형태의 지식에 관한 테크놀로지에 적용된다. 기술학분야는 전통과 이해관심의 영향을 받으며 불가피하게 오류를 포함한다. 이러한 한계는 기술 설계의 결함에 나타나며, 이는 주어진 사회 집단의 이해관계를 특권화하도록 편향되거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예상치못한 위험을 포함시킬 수 있다.

 

편향(bias)은 편견이나 사리사욕을 조장하는 것으로 의심할 수 없는 기술 설계에 숨겨져 있다. 그럼에도 외관상 무고한 설계는 편향되어 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면 사례는 더 복잡해 진다. 계급 이해는 산업혁명의 과정 속의 기계 설계와 상호작용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편견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한다. 문제들이 공적 의견과 독립되어 있는 기술학분야 내에서 암호화돼 있는 한 비판은 어렵다. 그럼에도 진보는전통에 얽매인 기술 분야 외부에서 올 수 있다. 시위, 논쟁, 보이콧, 해킹이 편향에도전하고 이를 가시화 한다. 후쿠시마의 사례처럼 기술 사고도 역할을 한다. 원자력은 기술적 실현가능성의 한계에 있어 예외적인 경우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문화에서 가류주의의 중요성을 분명히 한다. 후쿠시마 참사는 단순하게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기술적 문제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 유한성(한계성)은 1992년 리오 선언의 예방 원칙에서 수용되었다. 하지만 예방 원칙은 이를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위험을 허용할만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어떻게 구분하는지 불분명하다.

 

테크놀로지의 실제 세계 테스트는 공적 수용이다. 노동자, 이용자, 경우에 따라 서는 비의도적 피해자의 일상 경험을 통해 기술전문가의 작업이 '현실 확인'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편향과 위험에서 오는 궁극적인 뉴턴적 피드백이다. 기술이 보다강력해지고 널리 퍼지면서, 대중으로부터 그것을 격리하는 것은 보다  어려워지게 되었다. 피드백은 개발을 제약하고 그 진로를 되돌린다(7). 저항자들은 일단 동원되면 근대사회에서 노동 장치를 구축하는 기술 전문가들에게 그들 경험의 교훈을 강요하려고 시도한다. 이 상호작용은 공예 개발의 동역학을 상기시키지만, 근대 기관들은 이제 의사소통의 장애물을 창조한다. 피상적으로, 기술적 지식은 일상 경험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 전문가들은 자연에 대한 순수하고 객관적인 그들의 지식을 이데올로기적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비난하며, 가치와욕망이 사실과 진실의 물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저항자들은 일상생활에서 테크놀로지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전문가를 비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사실 기술적 지식과 경험은 상호보완적이다. 기술지식은 경험으로부터의 입력이 없으면 불완전하다. 공적 항의는 전문가들이 간과한자연과 사회적 삶의 양상에 의해 야기된 복잡성을 드러낼 수 있다. 항의는 가치와우선권을 형성한다. 

 

가치는 기술언어로 번역되지않고는 테크놀로지에 들어갈 수 없다. 불편한 기술적한계를 그저 버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동권은 엔지니어가 경사로의 위치, 폭, 기울기를 지정할 때만 시멘트로 만들어진다. 이것이 새로운 버전의 경쟁적 테크놀로지가 그것의 맥락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가치는 기술적 사실로 변환되고 테크놀로지는 그것의 사회적, 환경적 틈새를 더 잘 차지할 수있다.

 

요약하자면, 가치는 미래의 사실이다. 가치는 사실과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 근거 없는 단순한 주관적 욕망도 아니다. 우리의 세계는 그것의 창조를 관장하는 가치에 의해 형성되었다. 테크놀로지는 그러한 가치의 결정화된 표현이다. 가치의 언어로 형성된 항의는 아직 기술적 환경에 통합되지 못한 실재의 측면을표현한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러한 새로운 가치는 수정을 위한 설계 구축을 개방한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과학은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관찰자로서 불가침의 층위를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과학에 의해 발견된 자연은 인류에 무관심해 보인느 반면,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은 의인화된 특성으로 포화되어 있다.

 

과학은 살아있는 경험을 비판하고 초월한다. 과학은 엄격한 비판을 통해 우리의 경험과 분리된다. 과학의 발견은 단지 일상 생활에서 발견되는 재현과 유사하게 자연에 대한 개선된 재현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면서 마주치는 자연은 문화적 또는 심리적 잔류물로 남겨진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개념은 경험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과 관련이 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의 경험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반대도 사실이다. 근대 기술은 자신의 실제 경험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기술 시민들의 항의인 반대 성향을 유발한다. 기술에 대한 민주적 관계의 돌파구는 그 경험을 재평가하는 데 달려 있다. 이러한 재평가는 과학 기술 지식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 환경 보호, 살기 좋은 도시 또는 안전하고 흥미로운 작업에 동기를 부여하는 가치에 대한 일종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든 인간이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가치들이다. 그것들은 과학이 아직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결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현실과 일치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현실이다.

 

환경정치는 산업화에서 물려받은 기술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변화는 매우 크다. 여기에는 공기, 물 및 음식에 대한 보호와 최근에는 재생 에너지 혁신이 포함된다. 진도가 고르지 못하며, 그 결과 불충분하다고 판단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의견과 태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술과 그 영향의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문명과 문화에서 작동하는 두 가지 존재론적 원칙, 즉 과학과 경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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