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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 ANT의 actant 개념 재고: '행위자' 개념 오해

연구노트

by actant 2022. 3. 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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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류세와 신유물론 문제의식의 대두로, 이 담론의 주요 이론적 자원 중에 하나인 라투르의 ANT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ANT에 영감을 받은 주요 사상가(또는 이론가)들은 ANT를 (라투르의 주장처럼) 자연(자 연물)-문화(인공물)의 이분법을 해소하는 대안으로서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 행위자가 수평적이고 균질하며 평평한(또는 평등한) 네트워크 존재 안에서 융합되어 - “차별하지 않는”(홍성욱 2010:22) - 그 경계가 사라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e.g. D. Haraway, J. Bennett). “신유물론의 문제는 물질 혹은 사물 자체의 능동적 역량, 즉 행위성을 얼마나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사물의 행위성이 인간의 행위성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하는 점에 대한 판단에 결부된다”(김상민, 김성윤 2019:66). 하지만 세계(가령 지구행성)를 신 유물론적 존재론으로 이해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비인간 행위자를 인간 행위자처럼 낭만화한다. ANT(또는 이에 바탕을 둔 신유물론적 존재론)은 현상에 대한 분석적, 설명적 담론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 정치적 주장이나 “규범적 주장”(김상민, 김성윤 2019:77)으로 손쉽게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라투르 자신도 ‘정치적 존재론’을 표방하고 있다).

 

라투르에 대한 통속적 오해들과는 달리 네트워크(존재)를 구성하는 행위소들의 위상을 다시금 정확히 이해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 문제는 ANT가 태동한 과학사회학 논쟁과 초기의 아이디어를 검토하는데서 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학지식사회학의 에딘버러학파(스트롱 프로그램; 사회구성주의)가 제기한 자연/문화 또 는 경험/사회의 대칭성 명제와 그에 대한 라투르의 비판과 ‘사회적인 것’의 재조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베넷은 사물들이 “수행적 연결관계 안에 포함되기 ‘전’에 어떤 활력(vital force)”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Gamble, Hanan & Nail 2019:120). 렘케에 따르면, 베넷의 관점은 “집합적 개별 실체들(the assembled individual entities)이 포함되는 관계들과 무관하게 집합적 개별 실체들에 속한 생기력이 집합체 이전에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Gamble, Hanan & Nail 2019:120에서 재인용). 이러한 베넷의 입장은 “힘의 존재론(the ontology of force)”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들이 평가하다시피, 비수행적 물질관을 낳는다. 이러한 입장은 라투르의 수행적 물질관과는 매우 상이하다(그래서 라투르가 옳고 베넷이 틀렸다고 주장하 는 것이 아니라, 둘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라투르를 위시한 신유물론자들은 사물에 대한 재현주의를 기각한다. 라투르를 따르자면 어떤 사물 또는 현상이 기술(description)되기 전에 그 기술과 실재 간의 일치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중요한것은기술되는 - 논쟁을통해 - 과정 속에서등장하는사물들의 움직임 또는 그영향력을 포착하는것 이다. 이것이 담론적 실천과 행위소에 대한 수행적 이해의 근간을 이룬다.

 

행위소란 “한 실험(trial) 안에서 다른 실체(entity)를 조정(또는 변형)하는 임의의 실체이며, [이 때에-필자 주] 행위자들(행위소)이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행위소들의 역량은 역량은 그들의 수행들로부터 연역된다. 다시 말해 행동은 초보적이든 아니든 항상 실험의 과정 안에서와 실험 프로토콜에 의해서 기록된다”(Latour 2004:237). “핵심은 행위자를 실험실의 실험(trials) 하에서 그것이 무엇인지에 의해서, 즉 그것의 수행들을 통해서 정의하는 것이다. 행위자의 역량은 이후에 제도의 일부에서 연역되어 제도를 만든다”(Latour 2000:303).

 

주지하다시피, 이 개념이 ‘실험실 연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trial”은 일차적으로 “실험”이나 “시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단순히 “시행”이 아니다). 또한 그가 “행위자의 발생”과 사물의 “복잡하고 논쟁적인 본성”을 다루고자 하는 과학학의 취지 속에서(Latour 2000:303), 이 개념은 어떤 불확실한 낯선 실체(관계들)를 규정하기 위한 (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논쟁의 실행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위자는 그것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실험(trials)에 의해 정의되는데, 이 실험은 새로운 수행들이 유도되는 다양한 종류의 실험들일 수 있다.행위자가 정의되는 것은 실험을 통해서이다”(Latour2000:311). 행위소의 행위력은 실험을 기록하고 시험과정 속에서 개입하는 요소들의 목록을 나열하며 실험실 내에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논쟁에 부쳐지고 결과적으로 잠정적인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구축되고 나서야 비로소 행위력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달리 말해 실험과 논쟁의 과정을 수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과정(잠정적 결과)으로부터 행위소의 행위력을 연역내지 추론해 낼 수 있다. 따라서 행위소는 여러 논평자들이나 계승자들이 오해하듯 선험적인 행위자가 아니다. 

 

“행위라는 명명(name of action): 시험들(trials)으로부터 발생하는 행위자가 있는, 실험과 같은 미지의 상황 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 이 행위자는 아직 본질을 지니지 않았다. 행위자는 실험실 안에서 오로지 효과들 또는 퍼포먼스의 목록으로서만 정의된다. 역량은 나중에서야 비로소 그러한 퍼포먼스로부터 추론(또는 연역)된다. 즉 본질은 행위자가 왜 이같이 행동하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추론된다. ‘행위라는 명명’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모든 사실성의 화용적 기원(the pragmatic origin of all matters of facts)을 상기시키게 한다”(Latour 20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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